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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기회의 땅 연재본

1부 4화. 아이번

by 사앵 2023. 7. 31.

 

 

 

 1939년 9월, 라이히가 폴카스를 침공했다. 두 번째 세계 대전의 서막이었다. 이듬해에는 프랑크가, 또 이듬해에는 루스가 공격받으면서 크레타 대륙 전역이 전장으로 변했다.

 전세를 관망하던 컬럼비아 정부는 1943년에 돌연 참전을 결정했다. 전시 상황을 이용해 노동과 생산을 가열시켜 경제 불황을 타계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국민 여론은 비관적이었다. 정부가 내건 참전 명분인 '자유 세계 수호'는 너무나도 작위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자국의 영토 보호나 탈환을 위한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났지만, 정부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참전을 강행했다.

 전쟁은 1945년 5월에 라이히의 파시스트 정권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끝났다. 루스군이 라이히의 수도에 가장 먼저 진입했기에 전후 처리는 루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루스의 잠재적 경쟁자였던 컬럼비아에게는 보상이 거의 없었다. 이 년간 들인 막대한 전쟁 비용에 비해 이익은 적었고 손해가 극심했다. 참전 후 미약하게나마 상승하던 경제 지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경제가 또다시 파탄 나자 반정부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시위는 시아시주 무스 카운티 교회에서 주도한 옐로우 캡 운동이었다. 노란 모자를 쓰고 현 정권의 퇴진을 외치던 목소리는 무스 카운티와 시아시주를 넘어 한 달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무차별적으로 진압을 시도하자 시위는 점차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약탈과 방화 신고가 매일 수백 건씩 접수되었다.

 공권력이 먹히질 않자 정부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민중에는 민중으로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연방수사국장이 직접 나서서 카일루스 연합의 총수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호민관(Tribunus Plebis) 이상 고위급 인사들의 사면권과 여러 국가사업의 지분을 약속받은 연합은 태스크포스를 발족했다. 세 명의 집행관(Enforcer)이 지휘하는 태스크포스의 각 팀은 배정된 지역의 자경단으로 위장, 해당 지역의 시위대를 공격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연합의 전략은 효과적이면서 치명적이었다. 폭동과 연관된 인명 피해는 조금 늘었지만, 재산 피해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연말이 되자 폭동은 기세가 꺾여 비로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호텔 그랜트 라이언하트. 델리치아시티 엘 도라도 카지노. 뉴크로이 오스트리치 택시 회사까지. 연합의 일 년 총수익의 사 퍼센트를 기여하는 업체들이 지난달 이십칠 일에 옐로우 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라이언하트 호텔은 재개장까지 최소 두 달이 소요되고 엘 도라도는 전소, 오스트리치는 본사를 옮겨야 한답니다."

 아이번이 사진 몇 장을 회의실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유리창이 깨지거나 불에 탄 건물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경영위원 열두 명 중 누구도 사진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이번은 조용히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각기 다른 도시의 시위대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날짜에 우리의 주 수입원들을 공격했습니다."

 다운타운 D.C.의 그랜트 타워에서 진행되는 이번 경영위원회 회의의 안건은 옐로우 캡의 동향과 태스크포스의 실적이었다. 태스크포스 팀장이었던 아이번은 실적 보고를 위해 초청되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가, 아이번?"

 경영위원장 알렉 윌슨이 질문했다.

 "연방수사국이 뒤통수를 친 걸지도 모릅니다. 수입원의 위치를 옐로우 캡 수뇌부에 넘긴 거죠."

 "헛소리야. 우리 덕에 시위를 거의 진압했는데 정부가 왜 그런 짓거리를 하겠어?"

 부위원장 세라 도프먼의 말에 아이번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뭐든 확실히 해놓는 게 좋죠. 그래서 말인데 총수님께서 수사국장을 한 번 더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불가능하네."

 윌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총수님 건강이 최근에 더 나빠지셨다네. 주치의 말로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라더군."

 "뭐 다른 가능성은 없나?"

 경영위원 로버트 러먼이 아이번에게 물었다. 그는 사진을 한 장 집어서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

 "물론 있습니다. 내부자가 배신했을 수도 있죠."

 아이번의 말에 순식간에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경영위원 중 일부는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는 듯 아이번을 쏘아보았고 일부는 아이번의 눈을 피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면밀히 조사해보도록 하지. 페나인에서는 수고 많았네, 아이번. 그만 나가보게."

 윌슨이 말했다. 아이번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이전에도 회의실을 종종 드나들었지만, 저 공간의 역겨운 공기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애덤 그랜트 주식회사의 대주주 열두 명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는 연합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그들은 D.C.뿐만 아니라 지방 군소 세력에까지 마수를 뻗쳤고 그 마수가 지나간 자리에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아이번은 그 냄새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불행히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또다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줄리어스 스트라우스가 타고 있었다.

 "오, 아이번."

 스트라우스가 반가운 척을 했다.

 "줄리어스."

 아이번이 머뭇거리자 스트라우스가 문 앞에서 비켜서며 말했다.

 "뭐 하고 섰나? 같이 타고 내려가지."

 별수가 없었다. 아이번은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가 줄리어스 옆에 섰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번은 흘끗 엘리베이터 버튼을 응시했다. 일 층 버튼에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냥 중간에 내려야 할까 아이번은 망설였다.

 "위에서 총수님을 뵙고 오는 길이라네. 최근 몬티솔 쪽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스트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새 TF를 꾸려서 대응한다고 들었습니다."

 "글쎄. TF도 TF지만.. 난 총수님의 권위가 떨어져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네. 총수님께서 정정하실 때는 고개도 못 들던 것들이 병상에 좀 누워 계신다고 기어오르고 있지 않나."

 스트라우스가 말했다.

 "날이 갈수록 총수님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는데 그 권위를 지켜야 할 근위대는 정작 손을 놓고 있다는 게 문제일세.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군. 말이 근위대지 사실상 법무관 말만 듣는 법무관 똘마니들이니까."

 "근위대를 폐지하려 하시는 겁니까?"

 아이번의 물음에 스트라우스가 킬킬대며 웃었다.

 "폐지라니? 난 그럴 권한이 없네. 해서도 안 될 일이고. 난 단지 근위대의 개혁을 원할 뿐이야. 지휘권을 여러 명한테 분할해 위원회 형식으로 운영하면서 사병화를 막는 거지."

 구구절절 말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경영권자들이 근위대의 일에도 관여하겠다는 뜻이었다. 날이 갈수록 경영인들의 권세는 위협적일 수준으로 커지고 있었지만, 연합의 보스들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수가 마치 부모를 대하듯 그들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말일세."

 별안간 스트라우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숙부님의 묘에 다녀왔다네. 벌써 칠 년이나 됐더군."

 아이번이 눈을 질끔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칠 년 전, 연합에 이름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이번은 다운타운 D.C. 북부의 집행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연합 소유의 은행을 지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어느 날 밤에 은행 앞을 순찰하던 중 별안간 한 노인이 다가와 자기 조카가 연합 경영권자라며 은행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처음엔 적당히 상대하려 했으나 노인은 아이번의 얼굴에 자기 가방을 던지더니 빨리 문 열고 돈이나 담으라면서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제대로 열이 뻗친 아이번은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를 오토 스트라우스에게 휘둘렀다.

 숙부의 부고를 듣고 격노한 스트라우스는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연합의 관련자를 해치면 어떻게 되는지 불한당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D.C.를 이 잡듯 뒤져서라도 진범을 잡아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스트라우스의 집요함은 구세력 인사들은 물론이고 다른 경영권자들도 질리도록 만들었다. 결국에는 이오시프 바실리예프가 나서야 했다. 자신의 스승이자 연합 경영권자들의 원로 격인 이오시프의 말 몇 마디에 스트라우스는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이오시프가 나서준 덕에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칠 년이 지난 지금 진범이 누구인지는 스트라우스도 대충은 알고 있을 터였다.

 "오토 스트라우스 씨 일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범인이 빨리 잡혀야 할 텐데요."

 "그래. 그 망할 쥐새끼. 도대체 어디 쥐구멍에 숨은 건지."

 쥐새끼라는 단어가 아이번의 가슴을 후벼팠다.

 "자네 조부는 어떠신가? 이오시프는 건강하시지?"

 스트라우스가 대뜸 얼굴빛을 바꾸고는 물었다. 아이번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래. 오래 사셔야지. 이오시프도. 총수님도. 그래야 자네나 나나 편하게 살지 않겠나."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스트라우스가 아이번의 한쪽 어깨에 손을 턱 얹고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또 보자고."

 스트라우스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뒤에 남은 아이번은 스트라우스가 만진 어깨에 손을 갖다 댔다. 겉옷의 어깨 부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아이번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저들의 썩은 내가 자기 몸에도 베여 있다는 것이었다. 거물급 기업인의 양손자에게 묻어 있는 그 냄새는 무슨 짓을 해도 지워낼 수 없었다.

 "젠장."

 아이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중얼거렸다.





 실제 역사에서,

 황건당이 전국에서 난을 일으키다.

 기도위 조조, 영천에서 반군을 토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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