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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기회의 땅 연재본

1부 2화. 저택

by 사앵 2023. 7. 24.

 

 

 

 루치오는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지만,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문밖에서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치오는 고개를 돌려 응접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백발의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조부 알도 알레산드리니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루치오는 알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초상화 속 노인과 자신의 닮은 점을 찾던 중에 밖에서 수군거리던 하녀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루치오의 귀에 들려왔다.

 "도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숙부님꼐서.."

 "비켜."

 문이 벌컥 열렸다. 루치오는 일어서지 않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자기 또래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싼 정장을 입었는데 옷매무새가 단정하지는 않았다. 초록색 눈이 박힌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해 잘생긴 외모를 깎아 먹고 있었다.

 "너야? 우리 아버지 사생아라는 놈이?"

 루치오는 상대방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이복형제였다.

 "아마 그런 것 같은데."

 "하."

 소년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로돌포 알레산드리니. 카를로 알레산드리니의 둘째 아들이다."

 "그렇구나. 난 루치오라고 해."

 로돌포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 바스타르도(Bastardo, 사생아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너 때문에 패밀리 전체가 뒤집어졌어. 어쩌다 아버지랑 창녀 사이에서 너 같은 게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개판 오 분 전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 거야? 여기까지 와서 뭘 주워 먹고 싶은 거지?"

 루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로돌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뭘 보는 거야?"

 "두려운 거구나."

 루치오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넌 두려운 거야. 불쑥 찾아온 내가 네가 가진 모든 걸 빼앗을까 봐."

 루치오가 아무 감정을 싣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로돌포가 달려들어 루치오의 멱살을 잡았다.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서 엎어졌다.

 "이 개 같은 사생아 새끼가.."

 "로돌포! 손님한테 뭐 하는 짓이냐!"

 로돌포와 루치오가 고개를 돌렸다. 회색빛 머리칼의 중년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숙부님, 이 자식이 저를 모욕했습니다. 제 명예를.."

 "네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너보고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지?"

 로돌포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루치오를 한 번 노려보고는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하녀들이 눈치를 보며 커피로 얼룩진 테이블보를 치우는 동안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미안하구나. 워낙 버릇없이 큰 녀석이라 말이다."

 남자가 손짓으로 하녀들을 물리쳤다. 하녀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엔초 알레산드리니다. 패밀리의 보스를 맡고 있지. 너와 로돌포 저 아이의 숙부 되는 사람이란다."

 "루치오 알비니입니다."

 "알비니, 그래. 분명 그런 성을 가진 여자가 저택에 있었지. 이제 꽤 오래전이구나. 여기 앞에도 포도밭이 있기는 하지만 실리치아 저택의 포도밭은 정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지. 그 시절이 그립구나."

 엔초의 말이 거짓임을 루치오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눈과 말투에서 그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루치오. 네 아버지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고?"

 "예, 숙부님."

 엔초가 길게 한숨을 쉬고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그렇구나. 먼 길을 왔으니 이야기를 해주어야겠지."



 엔초의 말에 따르면 카를로는 루치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정확히는 실리치아를 떠나 컬럼비아로 돌아오자마자 죽었다.

 카를로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들은 항만 노동자 하나를 매수하여 매일마다 실리치아발 선박의 승선자 명단을 확인했다. 카를로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총에 맞아 죽었다. 후계자를 잃은 알도는 유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유족과 협력한 항만 노동자까지 찾아내 죽였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알도는 한동안 술에 빠져 지내다가 이 년 뒤에 죽었다.

 비극의 가족사를 전해 들은 루치오는 담담했다. 아버지의 요절은 패밀리와 어머니에겐 큰 비극이겠지만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루치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길 찾아온 이유는 아버지를 뵈려 한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말해 보거라."

 루치오가 엔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패밀리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엔초의 눈이 커졌다.

 "패밀리의 일원이라. 그래. 너한테는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알레산드리니의 피가 흐르니까 말이다."

 엔초가 느릿하게 말했다.

 "하지만 루치오. 이 세계에서는 자격 말고도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단다. 능력이지. 네가 너의 능력을 입증하지 않으면 패밀리와 이 업계의 그 누구도 너를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 문제에 관한 건데요, 숙부님."

 루치오가 말했다.

 "컬럼비아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엔초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공부를?"

 "예, 숙부님."

 루치오가 말했다.

 "실리치아에서는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저의 능력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엔초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입가를 매만지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루치오는 알 수 있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기숙학교를 알아봐 주마. 그리고 한 가지 더."

 엔초가 안경을 집어 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는 네 어머니의 성 말고 아버지의 것을 쓰거라."



 1931년, 기숙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루치오는 명문대인 에일 칼리지에 입학했다. 학사 졸업 후에는 에일 로스쿨에 진학했고 로스쿨 졸업 후에는 두 달 만에 D.C.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스물넷의 나이에 변호사가 된 것인데 D.C. 변호사 시험 합격자의 평균 연령이 삼십 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굉장한 일이었다.

 엔초는 가문의 경사라며 기뻐했고 알레산드리니의 이름으로 법률 사무소를 차릴 것을 루치오에게 제안했다. 루치오는 정중히 사양했다. 막 걸음마를 뗀 경력으로 패밀리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엔초는 그 뜻을 존중해주었다. 루치오는 로스쿨 선배인 해리 롬바르도의 사무소에 들어갔다.



 1938년 9월, 롬바르도 법률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째였다. 루치오는 앞에 앉은 의뢰인의 재판 관련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서류 너머의 의뢰인을 흘끗 바라보았다. 비싼 옷. 비싼 시계. 거만한 자세. 전형적인 돈 많은 집안의 이십 대 양아치였다. 자기 집안의 누군가가 떠올랐다.

 "바실리예프 씨."

 루치오가 서류철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재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의뢰인이 초조하게 물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입에서 떼며 물었다. 이 의뢰인은 며칠 전 폭행과 살인 혐의로 기소된 자기 사촌 동생의 변호를 요청했다. 안드레이 브루실로프라는 이름의 이십 대 남성이 한밤중에 은행 앞에서 오토 스트라우스라는 육십 대 남성을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이었다. 안드레이 브루실로프는 사건 현장 인근에서 체포되었고 오토 스트라우스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사망 판정을 받았다.

 변호를 의뢰한 날부터 지금까지 의뢰인은 늘 초조해했다. 사촌 동생의 재판이 마치 자신의 재판인 것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목격자들이 진술한 범인의 인상착의가 동생분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군요. 목격자들은 범인의 체구가 작았다고 증언했는데, 동생분의 키는 5피트 10인치(약 178cm)에 체격도 다부진 편이시니까.."

 루치오가 눈앞에 앉아 있는, 5피트 6인치(약 168cm) 정도의 키에 왜소한 체격을 가진 청년에게 말했다. 의뢰인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목격자들을 증인으로 신청하면 일이 더 쉬워지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생분은 금방 구치소에서 나오실 겁니다."

 "좋아요. 완벽해."

 의뢰인이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치오도 따라서 일어섰다.

 "아, 가기 전에. 이름이 알레산드리니라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아아."

 의뢰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또 봅시다."

 "재판 때 뵙겠습니다."

 의뢰인이 사무실을 나가자 루치오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서류철을 정리하면서 방금 그 미소는 무슨 의미였을지를 그는 생각했다. 일반인들은 뒤쪽 세계에서 알레산드리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을 알지 못했다. 그저 건설사를 경영하거나 와인 사업을 하는 가문으로만 인식했다. 길거리 삼류 양아치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그 미소는 비웃음이었을 것이라고 루치오는 판단했다. 재벌가에서 경영 대신 법의 길을 택한 이단아, 실력도 없이 집안의 뒷배만을 믿는 법조인을 향한 비웃음이었으리라.

 문이 열리더니 해리 롬바르도가 들어왔다. 그가 복도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방금 그거 바실리예프지?"

 "아는 사람이에요?"

 "아이번 바실리예프잖아. 바실리 컨설팅 회장 손자."

 재계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바실리 컨설팅이라면 루치오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바실리 매니지먼트 컨설팅. 루스 이민자인 이오시프 바실리예프가 설립한 굴지의 경영 자문 기업이었다. 대공황으로 국가 경제가 박살 나면서 기업들은 전문경영인을 필요로 했고 바실리 컨설팅은 자사 전문경영인을 기업의 경영권자로 밀어 넣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였다. 알레산드리니 패밀리 소유의 건설사인 마니에로(Maniero)도 일부 경영권이 바실리 컨설팅에 있었다.

 "저 양아치가 재벌 회장 손자라고요?"

 "확실해. 재벌 회장 손자라서 의뢰받은 거야."

 루치오가 문밖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 미소는 비웃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루치오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동질감을 느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걸지도 모른다. 가문의 이름이 갖는 무게를 필연적으로 견뎌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눈앞의 변호사와 같다고 느낀 것이다.

 "아무튼. 재판 준비 꼼꼼히 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고객이 바실리예프니까 잘 풀리면 개런티가 어마어마할 거야."

 "그러죠. 나도 흥미가 좀 생겼거든."

 루치오가 말했다.





 실제 역사에서,

 원소, 재야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하다.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袁術), 원소를 질투하며 미워하다.

 낙양북부위 조조(曹操), 환관 건석(蹇碩)의 숙부가 통금령을 어기고 건방을 떨자 곤장을 쳐 죽이다.

 조조의 사촌 하후연(夏侯淵), 조조가 중죄를 짓자 그 죄를 떠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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